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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tronomy

우리는 달에 가기로 정했다.(1)

사용자 글래스애니멀 2019. 10. 9. 16:03

1960년대 초에 기국은 '우주개발 경쟁'에서 소련에 뒤쳐져 있었다. 소련은 1957년에 최초의 위성을 쏘아 올리고 1961년 4월 16일에 유리 가가린을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되었다. 이에 맞서 1961년에 미국 대통령 존F케네디는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인간을 달에 보내는 데 전념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프로젝트는 신중하게 선택한 것이었다.  그때까지는 인류의 달 착륙이 어느 국가에는 요원한 일이어 서,소련이 초반 경쟁에서 앞서나가더라도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대 에는 많은 사람들이 달 착륙의 과학적 가치와 특히 그에 따른 위험 성과 기술적 복잡성에 의구심을 가졌지만,

우주 비행은  이제 미국 우주 계획의 초점이 되었다. 미국항공우주국(XASA) 관리자들은 충분한 재정 지원을 받아

1967년에는 달에 인간을 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NASA 국장인 제임스  E. 웹(James E. Webb)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2년을 연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961-1967년 사이에 6년 동안 NASA는 하드웨어의 기획,설계,구축을 대부분 민간기업. 연구소,대학들에 맡기고도 조직 규모가 세 배로 증가했다. NASA는 파나마 운하 건설과 원자 폭탄을 개발하는 맨해튼계획 정도만이 아폴로 계획에 투입되는 노력과 비용에 필적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방법으로 달에 갈까?
케네디 대통령이 역사적인 선언을 하던 당시 미국의 유인 우주 비행기록은 총 15분 에 불과했다. 이런 수준에서 

달 착륙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기술적 난관을 극복해야만 했다. 첫 번째 문제는 달에 도달하는 방법있었다.

 

'미션 아키텍쳐'라고 알려진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직접도달' 또는 '올더웨이'발식에는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키기에 충분한 연료를 탑재한 거대한 다단계 로켓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이 접근방식이 선호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비용이 많이드는 방식이었고. 1969년 마감 기한까지 이거대한 로켓을 만들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었다.

 

‘지구궤도 랑데부(Earthorbit rendezvous) 방식에서는 달로 향하는 로켓선이 이미 궤도 안에 안착한 모듈과 우주에서 

만나 도킹하게 된다. 무엇이든 우주로 쏘아 올리는 것이 지구를 벗어나는 모든 탐사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인데,이 방식은 다수의 로켓을 발사함으로써 굳이 단일한 우주선을 쏘아 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이  방식은 가장 안전한 선택지지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실질적으로 중량을 줄이는방법은 ‘달궤도 랑데부(Lunar Orbit Rendezvous, LOR)’ 방식이었다. 이 방식에서는 

작은 로켓이 3단 구성 우주선을 달로 향하는 경로까지 싣고 간다. 달에서 사령선은 지구로 귀환하기 위한 연료를

실은 채 달 궤도상에 남아 있고,경량의 이단 달착륙선만 달 표면으로 보내졌다. 이 방식은 신속하고 비교적 비용이 

적개 들지만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 우주비행사들을 영원히 우주 미아로 만들 매우 실질적인 위험이 따랐다. 

수많은 논의와 로비 활동 끝에 NASA의 마셜우주비 행 센터(Marshall Spaceflight Center) 책임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Wemher von Braun) 같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달 궤도 랑데부 방식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1962년에 이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것은 아폴로 계획의 수많은 믿음 의 도약 가운데 최초의 선택이었다.

 

기술적 장애물

1962년 2월 20일에 존 글렌(John Glenn)은 지구 궤도를 선회한 최초의 미국인이 되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진행된 미국 최초의 우주 비행 프로그램인 머큐리 계획의 일환으로 프렌드십 (Friendship) 7호를 타고 지구 주위를 

세 바퀴 돈 것이다. 머큐리 계획에 따라 성공적인 비행이 세 차례 더 이어졌지만,저지구 궤도의 운행과 달 착륙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발사용 로켓이 필요했던 것이다. 1인 우주비행사만 태운 머큐리 우주선과 달리. 

아폴로 탐사에는 네 명의 우주비행 사가 탑승해야 했다. 계다가 더 안정적인 동력원과 더 많은 우주 경험이 

요구되었다. 우주선에 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네계 최초의 연료 전지가 개발되었다

 

나사의 두 번째 유인 우주비행 프로그램인 제미니 계획은 체공 비행, 궤도 훈련, 우주 유영 등의 기술을 제공했다.

과학자들은 또 달 표면에 관해서도 더 많은 지식이 필요했다. 우주선이 두터운 분진층에 갇여 오도 가도 못하거나 반동추진 엔진이 꽉 막히거나 전자장비의 오작동이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폴로 계획과 병행하여 무인 탐사계획이 시작되었으나, 최초로 달에 파견된 일련의 로봇 탐사선들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갔다. 6대의 레인저 착륙신이 발사에 실패하거나 달에 착록하지 못하거나 외부 충격으로 부서지면서 

이 프로그램에는 ‘발사와 희망' 이란 별명이 붙었다. 다행히도 마지막 세대의 레인저호는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1966~1967년에는 루나오비터(Lunar Obiter) 위성 5기가 달 수위 궤도에 진입했다. 이 위성들은 달 표면의 

99퍼센트를 지도로 제작하여 아폴로호의 잠재적인 착륙위치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NASA의 서 베이어 (Surveyor) 우주선 7대도 역시 달의 토양에 연착륙할 가능성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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